로컬 브루어리 <인천 맥주>와 '개항로 프로젝트' 이창길 대장이 함께 만든 크래프트비어는 새로운 로컬 문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호불호가 갈리는 크래프트비어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맥주로 만들 수는 없을까?"라는 고민끝에 만들어진 <개항로 맥주>. 맥주병에 그려진 '개항로'라는 글씨는 54년 동안 개항로에서 목간판을 만든 <전원공예사>의 전종길 사장님이 썼고, 인천 <인형극장> 영화 간판을 그리다가 동화마을 미술가로 변신한 동화마을 벽화미술가 최명선 어르신께서 맥주 포스터 모델이 됐습니다. 또 <개항로 맥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두가 알 수 있도록 <라이트 하우스> 전시장에서 스토리를 공유하기도 했는데요. '지역성을 포함하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술'인 <개항로 맥주>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1부: 작은 공간에 알차게 담았다!-<개항로 맥주> 팝업
2부: "전문 모델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신다고요?"-<개항로 맥주> 포스터 모델, 동화마을 벽화미술가 최명선 어르신
3부: 쉼표가 느껴지는 글씨 '개항로 맥주체'-<전원공예사> 전종길 사장비로컬 2월 특집 주제는 1월과 마찬가지로 "로컬 맥주"입니다. 1월에는 '크래프트 정신'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2월 로컬맥주 특집에서는 크래프트비어 문화가 로컬브루어리를 통해 어떻게 문화로 정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레트로 느낌이 물씬 나는 <개항로 맥주>의 포스터는 꽤나 인상적인데요. 포스터를 만들기 위해 시니어 모델을 섭외한 것 같지만, 사실은 개항로에서 약 20년간 페인트 가게를 운영하면서 <동화마을> 벽화미술가로 활동하고 있는 최명선 어르신이 모델입니다. 그림을 그리던 노포 어르신이 어떻게 <개항로 맥주>의 모델이 된 걸까요? 그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개항로 통닭> 이창길 대장하고는 인연이 어떻게 되세요? 이창길 대장이 <개항로 통닭> 옆 골목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누가 그린 건지 수소문을 해서 어르신을 찾았다고 그러더라고요. 저희가 볼 때도 그냥 골목에 누가 낙서처럼 그린 거라기엔 색감이 참 예뻤어요.
☞최명선: 내가 극장 간판 했던 게 소문이 나서 벽화 그림 주문이 들어오고 그랬거든요. 인천 중구에 <동화마을> 벽화 일도 하고 있어요. 여러 사연이 있는데, 아무튼 이 벽화 보수를 할 때 컬러가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젊은 시대에 맞춰서 좀 바꿔가면서 해야 하는데 그런 작업들을 했어요.
어느날 이 대표가 우리 가게를 찾아와서 처음 만났어요. 옛날에 경동거리가 신혼부부들이 많이 와서 혼수품을 사는 거리였거든요. 그런데 이제 시대가 변해서 거리도 변했잖아요. 이 대표가 그 과거를 현실로 바꿔서 거리에 맞는 프로젝트를 해보려고 한다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보탬이 될 수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장인이라고 해야 하나 노포, 즉 한 가지 일에 오래 종사한 사람들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그 책자 만들 때 참석을 하게 됐죠.
▶극장 간판 일은 어떤 계기로, 언제 시작하시게 되었나요?
☞ 최명선: 올해 내 나이가 70 정도 됩니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다 먹고사는 게 좀 힘들었어요. 그래서 기술을 배워야겠다 싶어서 서울에 가 세공 일을 배웠거든요. 그런데 우리 어머님이 제가 태어날 때 달을 보셨다고 그래요. 뒤뜰에 달이 떨어진 걸 가져다가 안방에 올려놨더니 아랫목에 조그만 옥동자가 있었다는 거예요. 어머니가 “너는 하늘을 보고 태어났으니 여러 사람이 보는 직업을 택해야 한다”면서 “니가 어릴 때부터 만화책을 베껴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 그리는 일을 해보는 게 어떠냐?” 하시더라고요. 그 말씀을 듣고 인천으로 돌아왔어요.
하지만 그때만 해도 학원도 없고 그림 배우기가 쉽지 않았어요. 옛날에 서울 아현동에 만화 동네가 있었거든요. 다시 서울로 가서 무작정 그 동네를 찾아가 초안 작업부터 그림을 배웠죠. 그러다가 다시 인천으로 돌아왔는데, 어느날 보니 극장 간판이 참 멋있더라고요. 그래서 무작정 또 간판실을 찾아갔어요. 그렇게 간판실 막내로 일을 시작한 게 극장 간판 그리는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인데, 그 때가 벌써 중학교 때에요.
지금은 신나를 쓰지만 그 때만 해도 휘발유를 팔레트 위에서 희석해서 썼거든요. 남들은 그 냄새를 싫어하면 그림 못 그린다고 했는데, 나는 그 냄새가 그렇게 좋더라고요. 그래서 팔레트 닦고 심부름하면서 무일푼으로 막내 생활부터 시작했죠. 당시 인천에 극장이 한 10개는 있었던 것 같은데, 동시상영을 해서 간판이 여러 개가 붙는 하류극장부터 해서 이 극장, 저 극장 옮겨 다니면서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게 됐어요. 극장 간판실에서 미술부장이 최고로 높은 자린데 거기까지 올라가게 됐습니다. 나중에는 서울까지 범위를 넓혀서 <구리극장>, 부천 <장안극장> 등 몇 군데를 혼자 동서남북으로 다니면서 간판을 그렸죠.
▶극장 간판 그리는 일은 언제까지 하셨나요?
☞최명선: 90년대부터 CGV라는 극장이 들어오기 시작했거든요. 극장이 그렇게 클 줄 몰랐어요. 기존 극장들은 기껏해야 1관 있고 많아야 3관까지 있는데 CGV는 5관, 6관, 뭐 8관까지 있잖아요. 관객 입장에서는 내가 볼 수 없는 영화가 없는 거지. 다 있으니까. 그러니 젊은 사람들이 거기 가서 영화를 보게 되는 거예요. 오락, 멜로 다 고를 수 있으니까. 미술부장이 봉급이 센 편인데 기존 극장이 타격을 받으니까 내가 좀 보탬이 될까 해서 2002년에 <인형극장>을 끝으로 자진 하차를 했어요.
그리고는 지금 가게를 차려서 집 페인트칠도 하러 다니고 벽화도 그리고 하다 보니 19년 동안 이 자리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개항로 맥주> 모델이 된 사연이 궁금합니다.
☞최명선: 처음에 이창길 대표가 나한테 모델 문의를 해서 정말 깜짝 놀랐어요. 왜냐면 각선미도 있고 인물도 좋아야 하고 체격도 있어야 하고 그래야지만 모델이 되는 줄로 알았거든요. 내가 젊어서는 체력이 좀 좋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모델을 한다는 게 의아했어요. 이 대표 말로는 괜찮다고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 하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친구가 하자는 대로 하니까, 사진 다 찍고 난 다음에 흡족해하더라고요. 그러니 나처럼 B급이나 C급 되는 인물도 모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구나 했죠. 친구들한테 전화가 얼마나 왔는지 몰라요. 내가 친구들한테 너는 인물이 좋으니까 양주 쪽 모델도 될 거라면서 우스갯소리도 하고 그랬습니다.(웃음)
▶이창길 대장님이 전해주신 소식인데요. 따님이 <개항로 통닭>에 오셔서 포스터 모델이 우리 아빠라고 좋아하셨다고도 하더라고요.(웃음) 사실 포스터만 봤을 때는 ‘전에 모델이셨을까?’ 싶을 정도로 이 독특한 포즈가 엄청 자연스러워 보였어요.
☞최명선: 내가 원래 모델이었으면 스튜디오에서 여유롭게 하겠지만, 그게 아니더라고요. 웃기도 하고 소리도 질러보고 자유자재로 병 들고 움직이고 그러다보니 나왔어요. 그 저기 맥주 전문가랑 이창길 대표랑 나랑 셋만 있으니까, 여기서 “‘아’ 소리 질러보자” 하면 소리 지르고 "이런 포즈 취해보자" 하면 따라 하면서 수많은 컷을 찍으니까 그중에 그런 게 하나 나오더라고요.
▶정말 맥주가 맛있어 보이는 포스터에요. 개항로라는 오래된 거리에서 오랫동안 터 잡은 어른이 “이거 맛있으니 군소리 말고 마셔봐!” 하는 느낌도 들고요!
☞최명선: 과거에 모델을 했던 사람이 했으면 사실은 더 잘 나갔겠죠?(웃음) 내가 정석으로 그림을 배워서 조소과를 나오고 그런 건 아니지만, 하나의 재능을 살려서 여기저기서 그림을 배웠잖아요. 산전수전 겪은 사람이고 또 미술 극장에 대한 추억이 있거든요. 옛날에 60년대~80년대는 명절이면 극장마다 백미터씩 줄을 섰어요. 내가 그런 극장의 간판을 그리고 또 여러 영화들을 보니까 어떨 땐 이 영화가 흥행이 되겠다 안 되겠다고 보이더라고요. 그런 나만의 추억들이 있으니까, 그게 포인트가 되어서 나름 그 맛이 포스터에서 보이는 게 아닐까 생각도 드네요...
최명선 어르신과의 인터뷰를 통해 <개항로 맥주>가 하나의 로컬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아빠가, 내가 아는 친구가 모델이 된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있고 그 맥주를 마실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주민들이 나눌 수 있는 이야기 거리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지역주민과의 공감이라는 콘텐츠를 크래프트비어라는 그릇에 담아 새로운 문화를 표현하고 있는 개항로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집니다.